2001년, 대한민국 전력 산업은 효율성 제고와 민영화 기반 마련을 위해 ‘한전 분할’이라는 거대한 실험을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탄생한 발전 5사(남동·중부·발전·서부·남부) 체제는 지난 25년간 국내 전력 공급의 핵심 축을 담당해 왔습니다. 그러나 2026년 현재, 우리는 이 해묵은 체제를 해체하고 새로운 통합의 길을 모색해야 하는 ‘에너지 대전환’의 변곡점에 서 있습니다.
1. 분기점에 선 ‘발전 5사’ 체제: 왜 지금인가?
정부가 발전 자회사 통폐합에 속도를 내는 표면적인 이유는 공공기관 경영 효율화입니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더욱 시급한 국가적 과제들이 산적해 있습니다.
- 중복 투자와 과도한 내전: 해외 사업 수주 현황을 보면 발전 5사가 ‘K-전력’이라는 이름 아래 한 팀으로 움직이기보다, 서로 경쟁하며 입찰가를 낮추는 등 국가적 자원 낭비를 초래한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 에너지 전환의 실행력 강화: 2035 국가온실가스감축목표(NDC) 달성을 위해서는 분산된 자원을 집중시켜야 합니다. 화력 발전 중심의 5개 사가 제각각 신재생 에너지 사업에 뛰어드는 현재의 방식으로는 규모의 경제를 달성하기 어렵습니다.
“왜 이렇게 나눴는지 하는 생각이 든다”는 이재명 대통령의 발언은, 과거의 분할 모델이 더 이상 탄소중립과 글로벌 경쟁력 강화라는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지 못하고 있음을 시사합니다.

2. ‘기능별 재편’이라는 새로운 청사진
이번 개편의 핵심은 단순히 숫자를 줄이는 것이 아니라, 발전원별 전문성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흐를 가능성이 높습니다. 현재 거론되는 유력한 시나리오는 다음과 같습니다.
- 가칭 ‘재생에너지공사’ 설립: 발전 5사에 흩어져 있는 풍력, 태양광 등 신재생 에너지 기능을 하나로 묶어 컨트롤타워 역할을 수행하게 합니다.
- 화력 발전의 단계적 통합: 석탄 및 LNG 발전을 담당하는 조직을 (가칭)‘한국발전공사’로 통합하여 운영 효율을 높이고, 노후 화력 발전소의 폐지 및 전환을 전략적으로 관리합니다.
이러한 재편이 성공한다면, 한국수력원자력(원자력) - 한국발전공사(화력) - 재생에너지공사(신재생)로 이어지는 에너지원별 전문 공기업 체제가 완성될 것입니다.
3. 혁신의 길목에서 마주할 세 가지 암초
정부의 강한 의지에도 불구하고 실제 통합까지는 험난한 과정이 예상됩니다.
- 노사 갈등의 파고: 조직 통합은 필연적으로 인력 구조조정이나 직급 체계 개편에 대한 불안감을 조성합니다. 발전 노조의 반발을 잠재울 수 있는 세밀한 고용 안정 대책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 지역 경제의 위축 우려: 현재 각 발전사 본사가 위치한 충남, 강원 등 지자체들은 본사 이전이나 조직 축소가 지역 경제에 미칠 타격을 우려하고 있습니다. 지역 사회와의 상생 안은 필수적인 전제 조건입니다.
- 규모의 불경제 경계: 유승훈 교수의 지적처럼, 단순히 덩치를 키우는 것이 반드시 효율로 이어지지는 않습니다. 거대해진 조직이 오히려 관료화되고 의사결정이 느려지는 ‘규모의 불경제’에 빠지지 않도록 유연한 거버넌스 설계가 필요합니다.
맺으며: 12차 전기본, 전력 백년대계의 시작
기후에너지환경부가 발주한 연구용역 결과는 올해 수립될 제12차 전력수급기본계획의 핵심 골자가 될 것입니다. 이번 통폐합 논의가 단순히 장부상의 수치를 맞추기 위한 공공기관 효율화에 그쳐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목표는 명확합니다. 에너지 안보를 튼튼히 하면서도 탄소중립이라는 거대한 파도를 넘을 수 있는 ‘슬림하지만 강력한’ 전력 생태계를 구축하는 것입니다. 25년 만에 다시 시작된 이 실험이 대한민국 전력 산업의 체질을 바꾸는 진정한 혁신이 되기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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